예수님을 따르는 발걸음은 내가 그어놓은 종교적·사회적·심리적 경계를 깨뜨리고, 내가 불편해하는 자리, 세상에서 소외되고 그늘진 ‘사마리아와 갈릴리’ 같은 곳으로 주님의 사랑을 들고 먼저 손을 내밀며 전진하는 삶입니다.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요한복음 5:1-9상).
(1) 저는 요한복음 5장 1-18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7가지 표적(기적) 중 세 번째 기적인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기적’의 말씀을 두 부분으로 나눠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 부분인 요한복음 5장 1-9절 상반절 말씀만 묵상하고 다음에 9절 하반절-18절 말씀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 요한복음 5장 1-9절 상반절 말씀을 한국어 성경과 헬라어 성경으로 읽었을 때 제일 먼저 관심을 갖게 된 점은 예수님의 이동 경로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는 “유대를 떠나서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셨고(4:3-4), 사마리에서 이틀 머무신 후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셨었다가(43절), 오늘 본문 요한복음 5장에 와서는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5:1). 이렇게 예수님의 이동 경로를 사도 요한이 자세히 기록한 의도(목적)가 무엇일까요?
1. 첫째 의도: 인간이 그어놓은 ‘종교적 영역과 기득권의 경계’를 완전히 해체하며 전진하시는 주님의 절대 주권입니다(5:1)
지리적 이동 속에 감추어진 구속사적 전개: 요한복음 4장에서 주님은 유대인들이 상종하지 않던 이방 사마리아의 장벽을 허무시고 영원한 생수의 복음을 부어주셨으며, 갈릴리 가나에서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며 죽음의 한계를 말씀의 권세로 정복하셨습니다(4:9, 14, 50). 그리고 이제 5장에 이르러 이스라엘의 종교적 성지이자 심장부인 ‘예수살렘’의 울타리 안으로 다시 정면 진입하십니다(5:1).
성경적 원리: 당시 예루살렘의 종교 권력자들과 바리새인들은 46년 동안이나 걸려 지은 크고 화려한 성전 건물, 그리고 자신들의 오랜 율법 전통이라는 틀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꼬투리를 잡아 함정에 빠뜨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이 벌이는 시기 질투나 권력 싸움에 휘둘리거나 마음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뿌리를 두신 분이며, 세상 모든 만물을 완벽하게 다스리시는 진정한 통치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그어놓은 종교적, 사회적 경계를 모두 깨뜨리셨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 갈릴리 지역을 자유롭게 오가시며,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계획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동 경로는, 그분이 온 세상의 참된 주인이심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2. 둘째 의도: ‘성전 체제’와 ‘명절’의 완성자이심을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요한복음의 독특한 구조 중 하나는 예수님이 유대인의 명절마다 예루살렘을 방문하신다는 점입니다.
요한복음 2장의 유월절(성전 정화), 5장의 명절(38년 된 병자 치유), 6장의 유월절(오병이어), 7장의 초막절, 10장의 수전절로 이어집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성전)으로 올라가시는 경로를 의도적으로 노출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구약의 율법과 명절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하러 오셨으며, 기존의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신앙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동(대체)시키고 계심을 보여주는 문학적 장치입니다.
3. 셋째 의도: 구원의 보편성 확장(유대인 중심주의 타파)입니다.
예수님의 이동 경로는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적·민족적 경계선을 끊임없이 무너뜨리는 과정이었습니다.
유대(전통 신앙) → 사마리아(소외·배척된 땅) → 갈릴리(이방의 땅) → 예루살렘(종교의 심장부)으로 이어지는 동선은 복음이 지리적·혈통적 장벽을 넘어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갈릴리에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후(4장),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5장) 극적인 대비를 통해,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소외된 변방(갈릴리)과 종교적 중심지(예루살렘) 모두에 동일하게 임한다는 것을 사도 요한은 경로를 통해 웅변하고 있습니다.
4. 넷째 의도: 고난과 십자가(치명적인 갈등)를 향한 필연적 전개입니다.
지리적 이동은 곧 예수님을 향한 적대감의 빌드업(Build-up) 과정이기도 합니다.
갈릴리와 사마리아는 예루살렘의 기득권(바리새인, 종교 지도자들)의 눈에서 비교적 벗어난 안전한 지대였습니다. 반면 예루살렘은 종교 권력의 심장부이자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가 도사리는 ‘위험한 공간’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갈릴리에서의 안전한 사역에 머무르지 않고, 명절이라는 타이밍에 맞춰 스스로 갈등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으로 걸어 들어가고 계심을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이 기적이 결국 유대인들과의 치명적인 충돌(5장 18절의 안식일 논쟁 및 신성모독 고발)로 이어질 것임을 암시합니다. 즉, 십자가 사건을 향한 필연적인 발걸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5. 다섯째 의도: 독자들을 향한 ‘현장감’과 ‘역사적 사실성’의 부여입니다.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1세기 말)는 이미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AD 70년)된 이후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당시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한 이방인 기독교인들과 다음 세대 독자들에게 이 사건이 허구가 아닌 역사적 시공간 속에서 일어난 명백한 사실임을 입증해야 했습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갈릴리로 가셨다가 다시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는 구체적인 동선과 이어지는 베데스다 연못에 대한 세밀한 묘사(5:2)는 독자로 하여금 예수님의 사역 동선을 입체적으로 따라오게 만드는 강력한 역사적 증거가 됩니다.
요약하자면, 사도 요한이 보여준 예수님의 동선은 단순한 스케줄 표가 아니라, "구약의 명절을 완성하시고, 유대와 이방의 벽을 허무시며,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고난의 자리(예루살렘)로 걸어가시는 메시아의 구속사적 발걸음"을 보여주는 정교한 연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인터넷).
(a) 여기서 저는 “구약의 명절을 완성하시고, 유대와 이방의 벽을 허무시며,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고난의 자리(예루살렘)로 걸어가시는 메시아의 구속사적 발걸음”을 묵상할 때 우리가 따라야 할 예수님의 발걸음(발자취)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a. 내가 그어놓은 ‘안전지대의 경계’를 넘어 소외된 곳으로 향하는 발걸음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쳐놓은 사마리아라는 지리적·감정적 바리케이드와 갈릴리라는 변방의 한계를 자유롭게 넘나드셨습니다.
우리의 적용: 우리 역시 삶 속에서 스스로 그어놓은 ‘안전지대(Comfort Zone)’가 있습니다. 내가 편한 사람, 나와 성향이 맞는 집단, 내 기득권이 보장되는 안전한 영역에만 머물려고 하는 성향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발걸음은 내가 그어놓은 종교적·사회적·심리적 경계를 깨뜨리고, 내가 불편해하는 자리, 세상에서 소외되고 그늘진 ‘사마리아와 갈릴리’ 같은 곳으로 주님의 사랑을 들고 먼저 손을 내밀며 전진하는 삶입니다.
b. 제도와 형식주의를 깨고 ‘생명과 영혼’을 최우선으로 두는 발걸음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심장부로 진입하신 것은 그들의 견고한 ‘46년 된 성전 체제’와 ‘안식일이라는 제도’의 껍데기를 깨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정작 38년 동안 방치된 비참한 영혼에 대한 긍휼이 실종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적용: 우리의 신앙생활이 종교적인 익숙함, 형식적인 예배 체제, 교회의 기득권 수호에만 갇혀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은 시스템이나 제도보다 ‘한 영혼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형식적인 종교 행위를 넘어, 내 주변에 신음하고 있는 깨어진 영혼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진짜 제자의 삶입니다.
c. 고난과 손해가 예상될지라도 ‘하나님의 시간표’에 순종하며 걸어가는 발걸음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종교 권력자들의 거센 반발과 생명의 위협(5:18)이 있을 것을 정확히 아셨음에도, 도망치거나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 시간표에 맞춰 묵묵히 예루살렘으로 진입하셨습니다.
우리의 적용: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다 보면 올바른 진리의 길, 사랑의 길을 선택할 때 도리어 손해를 보거나, 오해를 사거나,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하는 ‘위험한 예루살렘’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때 내 안위와 서열 싸움에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이 지금 원하시는 뜻인가?”라는 단 하나의 기준만 붙잡고 주도적으로 고난의 자리, 십자가의 자리로 걸어 들어가는 용기가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발걸음입니다.
d. 내 삶의 모든 주권을 주님께 이양하는 전폭적인 순종의 발걸음
예수님이 인간의 시기 질투와 사상 검증에 흔들리지 않으셨던 이유는 그분의 존재론적 기원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있었고, 오직 아버지의 다스림 속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적용: 우리가 세상의 평가, 사람들의 시선, 기득권의 서열 싸움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우리의 발걸음이 내 욕망이 아닌 ‘주님의 절대 주권’에 단단히 매여 있어야 합니다.
내 삶의 핸들을 주님께 완전히 맡겨드리고, 주님이 가라 하시는 곳에 가고, 멈추라 하시는 곳에 멈추는 ‘절대 주권에 대한 신뢰와 순종’이야말로 주님이 보여주신 가장 완벽한 발자취입니다.
요약하자면, 우리가 따라야 할 예수님의 발걸음은 "내 편안함의 경계를 깨고(사마리아/갈릴리), 영혼을 살리기 위해 형식주의를 넘어(성전 체제 해체), 손해와 고난이 올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주도적으로 순종의 자리(예루살렘)로 걸어 들어가는 발걸음"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인터넷).
(2) 둘째로, 저는 사도 요한이 ‘왜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에 관하여 오늘 본문 요한복음 5장 2-4절까지 자세히 기록하였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을까요?
1. ‘베데스다(자비의 집)’라는 이름에 감추어진 지독한 모순을 폭로하기 위함
‘베데스다’는 히브리말로 ‘자비의 집(House of Mercy)’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묘사한 그곳의 실상은 자비가 단 1%도 없는 ‘가장 잔인한 적자생존의 경쟁판’이었습니다.
행각 다섯의 의미: 다섯 개의 행각은 비바람을 막아주는 안식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가득 갇혀 있는 거대한 수용소이자 절망의 수렁이었습니다(3절).
물이 움직일 때의 잔인함: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할 때 "먼저 들어가는 자"만 나을 수 있다는 전설(4절)은, 병자들 사이에서 서로를 짓밟고 일어서야 하는 ‘종교적 무한 경쟁’을 유발했습니다. 38년 동안 누워만 있던 이 병자는 몸이 재빠른 다른 병자들에게 밀려 단 한 번도 첫 번째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요한의 의도: 사도 요한이 이 장소를 이토록 자세히 묘사한 이유는,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한다고 하던 예루살렘 종교 시스템이 얼마나 변질되었는지 그 민낯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소외된 이들을 향한 ‘자비’라는 이름은 허울만 남았을 뿐, 실제로는 가장 먼저 도달한 자만 구원을 얻는다는 세상의 냉혹한 무한 경쟁 논리가 하나님의 성지 예루살렘의 중심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음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2. 구약의 율법과 제사 시스템의 ‘철저한 무능함’을 시각화하기 위함
성경에서 숫자 ‘5’(행각 다섯)는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상징성을 가집니다. 유대인들에게 숫자 5는 율법의 상징인 ‘모세오경’을 뜻합니다.
율법을 상징하는 다섯 행각 밑에 수많은 중환자들이 신음하며 누워 있었다는 성경적 묘사는 매우 의도적입니다. 율법의 행각은 병자들에게 지붕(그늘)은 되어줄지언정, 그들의 근본적인 질병과 죄의 문제를 단 한 명도 고쳐주지 못하는 ‘율법의 무능함’을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또한, 이 연못이 ‘양문(Sheep Gate)’ 곁에 있었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양문은 성전에 제물로 바칠 양들이 드나들던 문입니다. 날마다 수많은 제물의 피가 흘러넘치는 양문 바로 옆에서, 38년 된 병자는 구원받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요한의 의도: 형식적인 제사(양문)와 거룩해 보이는 율법(다섯 행각)으로는 인간의 비참한 죄와 절망을 결코 해결할 수 없음을 폭로하며, 이제 이 무능한 체제를 깨뜨리실 ‘진짜 하나님의 자비(참 베데스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극적으로 대비시키기 위해 이 무대를 이토록 자세히 묘사한 것입니다.
3. 미신과 왜곡된 신학에 사로잡힌 인간의 ‘영적 맹목성’을 고발하기 위함
4절에 기록된 “물이 움직일 때 먼저 들어가면 낫는다”는 이야기는 성경의 진리가 아니라, 당시 그 지역에 퍼져 있던 ‘민간 신앙(미신)’이었습니다(그래서 어떤 고대 사본에는 4절이 괄호로 처리되어 있거나 생략되어 있습니다).
베데스다에 모인 수많은 병자들은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연못의 물이 언제 동하는가’라는 가짜 표적과 요행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땅의 물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그 눈먼 현장에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의 본체’이신 예수님이 걸어 들어오셨지만, 아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38년 된 병자조차도 예수님이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셨을 때, 주님의 권능을 구한 것이 아니라 "나를 저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며 여전히 땅의 연못(미신)만 탓하고 있었습니다(7절).
요한의 의도: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바로 곁에 두고도, 인간이 만든 종교적 전통과 기득권, 그리고 기복적인 미신에 눈이 멀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인간의 비참한 영적 눈멈(소경됨)을 베데스다의 환경을 통해 고발하고 있습니다.
결론: 첫째 묵상과의 연결:
결국 요한복음 5장 2-4절의 상세한 묘사는 "인간이 그어놓은 종교적 영역과 기득권의 경계"가 얼마나 타락했고 무능한지를 낱낱이 보여주는 서론입니다. 자비가 상실된 자비의 집(베데스다), 영혼을 살리지 못하는 율법(다섯 행각), 껍데기만 남은 예배(양문)의 경계 안에 주님이 정면으로 걸어 들어오셔서, "물이 움직이는 요행이 아니라, 오직 내 주권적인 말씀 한마디로 너를 살린다!" 하시며 그 종교적 울타리를 완전히 깨부수시는 장면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인터넷).
(a) “예루살렘 한복판 베데스다 연못의 모순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의 무한 경쟁 시스템과, 심지어 그 가치관에 물들어 버린 오늘날 교회의 아픈 단면을 거울처럼 비추어 줍니다. 이 모순이 우리 사회와 교회에 어떻게 투영되어 있는지 세 가지로 나누어 알려드립니다.
1. 현대 경쟁 사회의 축소판: ‘오직 일등만 구원받는 세상’
베데스다 연못은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만 낫는다’는 규칙이 지배하는 곳이었습니다. 2등부터는 아무리 치열했어도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 사회의 모습: 오늘날의 입시, 취업, 승진 구조와 똑같습니다. 오직 극소수의 '일등'과 '승자'만이 모든 혜택과 자원을 독식(Winner-takes-all)합니다.
잔인한 현실: 38년 된 병자처럼 애초에 출발선이 다르거나, 장애가 있거나, 뒤처진 약자들은 아무리 오랜 세월 노력해도 이 경쟁 체제 안에서는 절대로 자력으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사회는 이들을 향해 ‘자비’를 말하지만, 구조적으로는 철저히 배제하는 비정함을 보여줍니다.
2. 오늘날 교회의 기업화와 성과주의: ‘성공을 축복이라 부르는 모순’
베데스다(자비의 집)라는 거룩한 간판을 걸고도 실제로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교회도 이 세상의 논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능력주의의 침투: 사회에서 성공하고, 부유하고,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들의 간증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크게 부각되는 반면, 고난 중에 있거나 사회적 약자인 이들의 삶은 상대적으로 소외되곤 합니다.
성장과 효율 중심: 교회가 영혼의 아픔을 돌보는 '치유의 공동체'가 되기보다, 교인 수와 재정, 건물 크기라는 '숫자와 성과'를 경쟁적으로 쫓아갈 때가 있습니다. 이는 모세오경(다섯 행각)이라는 종교적 껍데기만 자랑할 뿐, 정작 그 아래 신음하는 38년 된 병자들을 방치했던 예루살렘의 종교 체제와 겹쳐 보입니다.
3. ‘각자도생’의 영성: ‘나만 먼저 살고 봐야 한다’는 이기주의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께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다’고 탄식한 장면(7절)은 현대인들의 철저한 고립과 이기주의를 보여줍니다. 연못가에 수많은 병자가 모여 있었지만, 그들은 서로를 향해 긍휼을 베푸는 이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밟고 일어서야 할 경쟁자'일 뿐이었습니다.
이웃의 실종: 오늘날 교회 안에서조차 '나의 문제 해결', '내 자녀의 축복', '우리 교회의 부흥'에만 매몰되어, 바로 곁에서 38년 동안 영적·육적으로 신음하며 죽어가는 이웃의 탄식에는 귀를 닫는 '각자도생의 신앙'으로 나타납니다.
마치는 묵상: 베데스다를 깨뜨리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이 잔인한 베데스다의 경쟁 룰(Rule)에 참여하여 38년 된 병자를 번쩍 들어 연못에 1등으로 던져주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 경쟁 시스템 자체를 무시하시고, 오직 주권적인 사랑의 말씀(‘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으로 그를 고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 할 본질입니다. 세상이 만든 무한 경쟁의 연못가에서 ‘누가 더 빨리 성공하는가’를 구경하는 곳이 아니라, 세상의 룰에서 탈락해 신음하는 영혼들에게 찾아가 주님의 절대 주권적인 치유와 사랑을 선포하는 ‘진짜 자비의 집’이 되어야 함을 이 본문은 준엄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인터넷).
(3) 셋째로, 저는 예수님께서 “서른여덟 해 된 병자”(요5:5)가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오래된 줄 아시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Θέλεις ὑγιὴς γενέσθαι(델레이스 휘기에스 게네스다이?)](6절)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병자가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절)하고 답변한 내용을 우리 자신에게 반영해보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 싶습니다.
1. ‘체념과 무기력’에 갇혀 구원의 본질을 잃어버린 우리를 향한 경종
예수님은 그의 비참한 상태를 “보시고 병이 오래된 줄 아시고” 찾아오셨습니다. ‘38년’이라는 세월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이뤄낼 수 있는 모든 소망과 에너지가 완전히 바닥나, 영적·심리적 ‘완전한 무기력 상태(Learned Helplessness)’에 빠졌음을 뜻합니다.
우리 자신에게로의 반영: 우리 역시 삶의 오랜 상처, 반복되는 죄의 습관, 깨어진 관계, 혹은 영적인 침체 속에서 "내가 기도를 안 해본 줄 알아? 안 돼, 내 인생은 원래 이래"라며 38년 된 병자처럼 깊은 체념 속에 누워 있을 때가 많습니다.
교훈: 주님은 오늘 그 영적 타성에 젖어 누워 있는 우리를 향해 "네가 정말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은 우리의 무뎌진 영적 갈망을 깨우시는 질문입니다. "너는 지금 단순히 연못가에 누워 종교적 위안을 얻는 것에 만족하고 있느냐, 아니면 근본적인 생명의 변화를 원하느냐?"라는 주님의 강력한 도전 앞에, 우리는 상실했던 구원의 갈망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2. "사람이 없다"는 탄식 뒤에 숨겨진 인간 의존증의 고발
주님이 "낫고 싶으냐"고 물으셨을 때, 병자의 첫 대답은 "네, 낫고 싶습니다"가 아니라 "주여,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였습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세상적 구조(베데스다 연못)와 인간적 수단(나를 도와줄 힘 있는 사람)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자신에게로의 반영: 인생의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위기를 만날 때, 우리의 솔직한 내면도 이 병자와 다르지 않습니다. "나를 이끌어 줄 유력한 '사람'이 없다", "내가 인맥이 없고 돈이 없다", "부모를 잘못 만났다"며 내 삶의 문제를 끊임없이 환경과 타인의 탓으로 돌립니다.
교훈: 이 답변은 우리가 입으로는 주님의 주권을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보다 사람을, 창조주보다 피조물의 도움을 더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철저한 인간 의존증’에 빠져 있음을 폭로합니다. 주님은 "사람이 없다"고 탄식하는 그 병자 바로 앞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말씀의 본체이신 참사람(Son of Man)"으로 서 계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사람의 유무, 환경의 유무가 아니라 바로 앞에 계신 주님 한 분만으로 충분함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3.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는 비교의 덫과 왜곡된 신앙의 틀 타파
병자의 답변 하반절은 타인을 향한 시기와 원망, 그리고 주님의 능력을 세상의 방식 안에 가두어 버리는 왜곡된 신앙의 실상을 고발합니다.
우리 자신에게로의 반영: 우리는 기도의 자리에서조차 "내 삶에 왜 역사하지 않으시냐"며 하나님을 향해 원망을 쏟아낼 때가 많습니다. 그 원망의 뿌리를 깊이 들여다보면 예외 없이 세상적 기준을 쫓아 타인과 비교하는 '비교의 덫'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나보다 덜 노력한 저 사람은 벌써 저만큼 앞서가는데, 왜 나는 여전히 이 비참한 연못가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까?"라며 세상이 짜놓은 성공의 사다리를 기준으로 삼아 내 인생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불평합니다. 더욱이 "주님, 저 사람보다 내가 '먼저' 저 연못(성공, 물질, 명예)에 뛰어들 수 있도록 나를 도우소서"라며, 하나님의 무한한 권능을 고작 세상의 룰에서 승리하게 만드는 도구로 축소해 버립니다.
교훈: 이 답변은 우리가 주님을 온 우주의 통치자로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상이 만든 경쟁 시스템 안에서 남들보다 한발 앞서게 도와주는 조력자' 정도로 주님을 왜곡하고 제한하고 있음을 폭로합니다. 주님은 병자가 낙심해 있는 그 비정한 연못의 경쟁에 함께 참여하셔서 그를 1등으로 밀어 넣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세상의 룰(rule) 자체를 완전히 초월하시는 창조주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남들보다 '먼저' 연못에 들어가는 세상의 성공이 아니라, 타인과의 비교를 멈추고 "내 말씀 한마디로 너의 깨어진 존재 전체를 온전케 하겠다"는 주님의 주권적인 구원 방식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를 원하십니다(인터넷).
(4) 마지막 넷째로, 저는 예수님께서 그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Ἔγειρε, ἆρον τὸν κράβαττόν σου καὶ περιπάτει(에게이레, 아론 톤 크라바톤 수 카이 페리파테이)](요5:8)고 말씀하셨을 때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καὶ εὐθέως ἐγένετο ὑγιὴς ὁ ἄνθρωπος, καὶ ἦρε τὸν κράβαττον αὐτοῦ καὶ περιεπάτει (카이 에우데오스 에게네토 휘기에스 호 안드로포스, 카이 에레 톤 크라바톤 아우투 카이 페리에파테이)](8절)는 말씀을 묵상할 때 어제 묵상한 요한복음 4장 50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Πορεύου, ὁ υἱός σου ζῇ (포레우우, 호 휘오스 수 제)].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1:1)의 입에서 하신 이 두 말씀을 묵상할 때 이사야 55장 11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70인경) οὕτως ἔσται τὸ ῥῆμά μου, ὃ ἐὰν ἐξέλθῃ ἐκ τοῦ στόματός μου, οὐ μὴ ἀποστραφῇ, ἕως ἂν συντελεσθῇ ὅσα ἠθέλησα, καὶ εὐοδώσω τὰς ὁδούς σου καὶ τὰ ἐντάλματά μου (후토스 에스타이 토 레마 무, 호 에안 엑셀데 익 투 스토마토스 무, 우 메 아포스트라페, 헤오스 안 쉰텔레스데 호사 에델레사, 카이 에우오도소 타스 호두스 수 카이 타 엔탈마타 무)] 이 말씀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1. 주님의 말씀은 시공간(Time & Space)과 인간의 불가능을 초월하는 절대적 ‘존재적 실재’입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이 있던 ‘가나에서 가버나움까지의 공간적 거리’도, 38년 된 병자가 묶여 있던 ‘기나긴 시간의 절망’도 주님의 말씀 한마디 앞에서는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못했습니다.
헬라어 본문에서 주님이 “일어나라[Ἔγειρε(에게이레)]”, “들라[ἆρον(아론)]”, “걸어가라[περιπάτει(페리파테이)]”라고 명령하시자마자, 성경은 “곧[εὐθέως(유데오스)] 온전해져서[ἐγένετο ὑγιὴς(에게네토 휘기에스)]”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고 기록합니다.
교훈: 주님의 말씀은 단순한 위로나 조언, 혹은 선언에 그치는 ‘말(Speech)’이 아닙니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셨던 창세기 1장의 말씀처럼, 선포되는 즉시 불가능한 현실을 재창조하고 바꾸어 버리는 ‘절대적인 물리적·존재적 실재(Reality)’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말씀을 대할 때는 세상의 지혜를 듣듯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송두리째 재창조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자기 목적성’을 성취하며 반드시 형통합니다.
이사야 55장 11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입에서 나가는 말은 절대로 공허하게 헛되이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70인경의 표현대로 “내가 원한 모든 것을 다 이룰 때까지” 전진하며, 마침내 그 길을 형통하게 만듭니다.
왕의 신하에게 하신 말씀은 그 아들을 살려내어 온 집안이 예수를 믿게 하는 목적을 완수했고(요4:53), 베데스다 병자에게 하신 말씀은 그의 38년 된 질병을 단숨에 끊어내어 율법과 미신의 무능을 폭로하는 목적을 완수했습니다.
교훈: 우리의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이고 주변 환경이 꽉 막혀 있을지라도, 내 삶에 주님의 말씀 한 구절이 정확히 떨어졌다면 그 말씀은 스스로 일하는 신성한 생명력이 있습니다. 내 믿음이 흔들릴지라도 내게 주신 주님의 약속의 말씀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시간표 안에서 반드시 100% 성취된다는 전폭적인 신뢰를 가져야 합니다.
3. 말씀의 성취를 경험하는 유일한 통로는 인간의 계산을 버린 ‘즉각적인 믿음의 반응’입니다.
사도 요한은 두 사건에서 매우 흥미로운 공통적 반응을 기록합니다. 4장에서 왕의 신하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4:50)”라고 했고, 5장의 병자는 주님이 말씀하시자마자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5:9)”라고 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주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내 다리 근육이 다 말라 비틀어졌는데 어떻게 일어납니까? 조금 움직여보고 나으면 일어날게요”라고 계산하거나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말씀의 권세가 그의 몸에 임했을 때, 그는 말씀에 반응하여 몸을 일으키는 믿음의 행동을 취했습니다.
교훈: 기적과 형통은 내 이성과 경험으로 주님의 말씀을 심사숙고할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비참한 형편(38년의 절망)과 인간적인 계산을 압도하는 주님의 말씀이 떨어졌을 때, 그 말씀의 권세를 믿고 의지적으로 내 ‘자리(매여 있던 절망의 처소)’를 걷어차고 일어나는 순종의 발걸음을 뗄 때, 이사야가 예언한 말씀의 형통함이 비로소 나의 삶에 실제가 됩니다.
결론: 요한복음 1장 1절과의 위대한 연결
이 모든 일의 근원은 예수님이 바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Logos)이신 성자 하나님’(요 1:1)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창조주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기에 사마리아의 장벽도, 가버나움까지의 거리도, 38년이라는 시간의 저주도 단 한 마디에 녹아내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그 창조주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삶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