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존재의 소리는 철저히 지워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빛만 흥왕하게 연결하는 신실한 징검다리”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요한복음 4:39-42).

 

 

(1) 오늘 저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하신 내용의 말씀인 요한복음 4장 3-42절 말씀 중 마지막 여섯 번째 부분인 4장 39-42절 말씀만 묵상하고자 합니다.  저는 39-42절 말씀을 한국어 성경과 헬라어 성경으로 읽었을 때 제일 먼저 관심을 갖게된 것은 헬라어 성경으로 39절 상반절을 보면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Ἐκ δὲ τῆς πόλεως ἐκείνης πολλοὶ ἐπίστευσαν εἰς αὐτὸν τῶν Σαμαριτῶν (에크 데 테스 폴레오스 에케이네스 폴로이 에피스튜산 에이스 아우톤 톤 사마리톤)]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데, 42절을 보면 “…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Οὐκέτι διὰ τὴν σὴν λαλιὰν πιστεύομεν· αὐτοὶ γὰρ ἀκηκόαμεν, καὶ οἴδαμεν ὅτι οὗτός ἐστιν ἀληθῶς ὁ σωτὴρ τοῦ κόσμου (우케티 디아 텐 센 라리안 피스튜오멘, 아우토이 가르 아케코아멘, 카이 오이다멘 호티 후토스 에스틴 알레도스 호 소테르 투 코스무)]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성경 구절이 인클루시오(Inclusio)라 생각합니다.  이 두 문장은 오늘 본문 요한복음 4장 39-42절 전체를 하나의 통일성 있는 단락으로 묶어주는 완벽한 인클루시오(Inclusio, 수미상관법/포괄구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단락의 시작(39절)에서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를 믿는지라"로 문을 열고, 단락의 끝(42절)에서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으로 문을 닫습니다.  이를 통해 요한은 39절부터 42절까지가 '사마리아인들의 믿음의 시작과 완성'이라는 하나의 독립된 주제를 다루는 단락임을 문학적 울타리로 친절하게 표시해 준 것입니다(인터넷).

 

교차대칭구조(Chiasmus, 샌드위치 구조):

 

A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39절)

       B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39절)

              C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40절)

B’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41절)

A’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42절).

 

[시작(39절): 동네 사람들의 믿음은 여인의 증언에 의존한 '간접적이고 미성숙한 믿음'이었습니다.  끝(42절): 예수님과 이틀을 함께한 후의 믿음은 친히 듣고 고백하는 '직접적이고 고백적인 믿음'으로 도약합니다](인터넷).

 

(a) 이 여섯 번째 단락(요4:39-42)은 단순한 사건의 기록이 아닙니다.  ‘여인의 소리(그림자)’를 통해 시작된 간접적인 믿음(A, B)이, 진짜 지성소 성전이신 예수님과의 친밀한 사귐(C)을 통과한 후, 마침내 ‘주님의 음성(레마)’을 통해 스스로 고백하는 독립적이고 참된 믿음(B', A')으로 도약하여 완성되는 구속사적 제자도의 전개 법칙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이 대칭 구조를 바탕으로, 본문이 오늘날 승리장로교회 온 성도님과 주님의 사명자들의 삶의 현장(가정, 일터, 교회) 속에 던지는 3가지 성경적 원리와 실제적 삶의 적용을 인공지능이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첫째 원리: 사명자의 ‘증언(B)’은 영혼들을 그리스도 앞에 머물게 인도하는 순전한 ‘징검다리의 소리’일 뿐입니다(4:39).

 

원어적 신비와 성경적 원리 ➔ 마르투레우세스 [μαρτυρούσης]: 39절에서 동네 사람들이 처음에 예수를 믿게 된 배경은 “여자의 말이… 증언하므로[μαρτυρούσης (마르투레우세스)]”였습니다.  여인은 자기가 숨기고 싶었던 부끄러운 실상(남편 다섯의 수치)이 주님의 참빛 앞에 투명하게 폭로당한 후(16, 18절), 세상의 물동이를 배설물로 기쁘게 내던져버리고 동네로 뛰어 들어가 “와서 보라” 복음의 소리를 질렀습니다(28, 29절, 빌 3:8).

 

그녀의 증언은 수많은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 빗장을 열어젖히고 예수를 향해 걸어 나오게 만드는 강력한 전도적 이정표가 되었습니다(30절).  그러나 사도 요한이 고발하는 영적 원리는, 인간 증언자의 소리와 고백은 영혼들을 주님께로 연결해 주는 임시적이고 유한한 징검다리(그림자) 단계라는 사실입니다(1:23, 26).

 

2.   둘째 원리: 진짜 참된 믿음의 완성(A')은 주님과 ‘함께 유하는 사귐[C]’을 통해 주님의 음성(레마)을 ‘친히 듣고 고백할 때’ 일어납니다(4:40-42).

 

교차대칭의 심장 ➔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ἔμεινεν ἐκεῖ δύο ἡμέρας(에메이넨 에케이 뒤오 헤메라스)] (C, 40절): 위의 샌드위치 구조의 가장 깊은 지성소 중심부(C)에는, 예수님이 사마리아 땅에 머무르신 ‘이틀의 시간’이 중심추로 박혀 있습니다(40절).  1장 38-39절에서 제자들이 주님을 향해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물었을 때 주님이 “와서 보라” 하시며 그날 함께 거하셨던[μένουν(메논)] 그 안식의 법칙이 여기서 동일하게 터져 나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이 그어놓은 상종하지 않는 높은 장벽을 완전히 차단해 버리고(4:9), 주님을 자기들의 삶 한복판으로 정중하게 모셔 들여 이틀 동안 주님의 품 안에서 영원히 고갈되지 않는 성령 세례의 생수와 친밀한 새 언약의 사귐을 충만하게 공급받았습니다(1:33, 4:14).

 

직접적인 믿음으로의 도약 ➔ "...친히 듣고 ... 앎이라"[ἀκηκόαμεν καὶ οἴδαμεν (아케코아멘 카이 오이다멘)] (A', 42절): 이틀의 친밀한 머무름을 통과한 성도들의 고백은 위대하게 뒤집어집니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 때문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친히 들었고[ἀκηκόαμεν (아케코아멘) - 완료형],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우리가 스스로 명확히 알기 때문이다[οἴδαμεν (오이다멘) - 현재형]"(4:42).

 

인간의 의지나 타인의 신학적 연륜을 빌려 쓰는 가식적이고 연약한 믿음의 울타리가 십자가 앞에 완전히 헐어지고, 성령님의 한량없는 조명하심을 통해 내 마음속 진짜 지성소 속에서 주님의 생생하고 살아있는 말씀을 실시간으로 들으며 고백하는 흔들리지 않는 독립적인 반석의 믿음이 완성된 것입니다(2:21, 3:34, 마 16:18).

 

3.   셋째 원리: 구원의 최종 결론은 인간의 울타리를 넘어 온 세상을 살려내시는 주님의 ‘만물 위의 주권’입니다(요4:42 하반절).

 

신앙고백의 장엄한 절정 ➔ "세상의 구주" [ὁ σωτὴρ τοῦ κόσμου (호 소테르 투 코스무)]: 사마리아 사람들이 마침내 입을 열어 터뜨린 예수님의 최종 직함은 유대인들의 얄팍한 정치적 왕이나 교세 경쟁의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향해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시라고 온 세상을 향한 위대한 구원의 선언을 당당하게 선포했습니다(42절).

 

모든 성도의 실제 삶에의 적용: 우리가 가정과 일터와 승리장로교회 속에서 신앙생활을 감당할 때, 내 가식적이고 세속화된 옛 자아의 연약함 때문에 날마다 낙심하고 계산기를 두드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그러한 한계에 자신을 묶어두지 않으시며, 이미 세 번째 유월절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하시는 신실하신 구원의 완성 선언을 온 인류 위에 영원한 보증으로 박아 두셨기 때문입니다(요 19:30, 요일 5:12).

 

세례 요한이 고백했듯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셨던 그 사명의 법칙을 기쁨으로 수용하고(요 3:30), 내 목사라는 타이틀이나 직분의 경험이라는 물동이를 기쁘게 배설물로 내던져버린 채(4:28, 빌 3:8), 날마다 주님의 은혜의 보좌(사랑의 식탁) 앞에 투명하게 나를 노출시키며 영과 진리로 아버지를 예배해야 마땅합니다(요 3:21, 4:23-24, 21:12).  내가 아무것도 아닌 자(Nothing)로 낮아져 오직 만물 위에 계신 주님의 말씀만 흥왕하게 높여드릴 때(3:31, 34), 주님은 성도님들의 삶 속에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완료형의 기쁨을 폭포수처럼 상시 부어주사(29절), 교회를 음부의 권세가 결코 이기지 못하는 영광스러운 신부로 날마다 찬란하게 단장시켜 가실 줄 확실히 믿고 확신합니다(마 16:18, 엡 5:27)(인터넷).

 

(2) 둘째로, 저는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διὰ τὸν λόγον τῆς γυναικὸς μαρτυρούσης ὅτι Εἶπέν μοι πάντα ἃ ἐποίησα (디아 톤 로곤 테스 귀내코스 마르튀루세스 호티 에이펜 모이 판타 하 에포이에사)](39절)(B)란 말씀과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πολλῷ πλείους ἐπίστευσαν διὰ τὸν λόγον αὐτοῦ (폴로 플레이우스 에피스튜산 디아 톤 로곤 아우투)](41절)(B’)란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여자의 말이... 말하였다 증언하므로(μαρτυρούσης)..."(39절)란 말씀을 묵상할 때 세례 요한이 생각났습니다: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μαρτυρήσῃ)..."(1:7).  요한복음에서 세례 요한의 가장 큰 정체성은 '빛에 대하여 증언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정확히 똑같은 단어가 사용됩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말이나 권위가 아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증언하여 사람들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두 사람은 사람들의 시선을 자신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옮겼다는 점에서 완벽히 일치합니다[세례 요한(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을 예수께 보냄); 사마리아 여인(4:42): 사마리아인들이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 때문이 아니다"라고 할 때, 여인은 서운해하지 않고 숨어버립니다. 자신의 역할(길을 예비함)이 끝났음을 알았기 때문임].  사마리아 여인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C),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있도록(B') 길을 열어주고 무대 뒤로 사라지는 전형적인 '세례 요한식 선구자'의 구조 속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사마리아 여인은 유대교의 경계를 넘어 이방 세계(사마리아)에 주님의 길을 예비한 최초의 선교적 선구자라는 점에서 성경 구속사적으로 엄청난 의미를 가집니다(인터넷).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a) 유대 광야의 거장이었던 세례 요한과 사마리아 수가성의 소외된 여인은 성경 구속사 한복판에서 “내 존재의 소리는 철저히 지워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빛만 흥왕하게 연결하는 신실한 징검다리”라는 청지기적 본질 속에서 완벽하게 하나로 도킹(결합)하고 있습니다.  유대교의 장벽을 넘어 이방 세계에 주님의 길을 닦은 최초의 선구자로서 이 여인의 발걸음이 오늘날 승리장로교회 모든 성도님과 주님의 사명자들이 삶의 자리에서 품어야 할 3가지 성경적 원리와 실제적 삶의 적용을 인공지능이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첫째 원리: 모든 성도와 사명자의 최종 정체성은 내 평판을 지우고 오직 ‘빛에 대하여 증언하는 소리’가 되는 것입니다(요 1:7, 23, 4:39).

 

원어적 신비와 성경적 원리 [μαρτυρούσης (마르튀루세스)]: 요한복음 4장 39절에서 사마리아인들을 예수께로 이끌었던 여인의 말 이면에는 ‘마르튀루세스(μαρτυρούσης) (증언하는)’라는 분사형 단어가 굳건하게 박혀 있습니다.  이 단어는 요한복음 1장 7절에서 세례 요한의 사명을 천명할 때 쓰인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μαρτυρήσῃ (마르튀레세)]”라는 단어와 완벽하게 동일한 영적 혈통을 지닙니다.

 

증언자는 결코 자기 자존심의 상(Table)이나 46년 동안 지어 올린 가짜 건물 성전의 기득권을 세상에 자랑하지 않습니다(2:15, 20).  내 생각의 계산과 무력함을 십자가 앞에 기쁘게 완전히 완전히 뒤엎어버리고, 오직 내 삶 한복판에 찾아오셔서 내 모든 부끄러운 과거(남편 다섯의 수치)를 정화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의 아름다움만을 세상에 있는 그대로 반사해 주는 순전한 통로로만 살아감을 뜻합니다(4:17, 18, 26).

 

2.   둘째 원리: 복음 전파자의 역할은 영혼들을 주님과 ‘직접 대면하게 만든 후’ 기쁘게 무대 뒤로 사라지는 것입니다(3:30, 4:42).

 

자기 부인의 영광 ➔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30): 세례 요한은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이 다 예수께로 가버리는 상실의 현실 앞에서도, “신랑의 목소리를 듣는 친구의 기쁨으로 내 내면은 이미 완료형으로 가득 차올랐다” 고백하며 기쁘게 쇠하여 지는 길을 택했습니다(3:26, 29, 30).

 

오늘 본문의 사마리아 여인 역시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직접 만나 이틀을 함께 머문 후(4:40),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 때문이 아니다”라고 자기를 철저히 소외시키고 지워버리는 고백을 던질 때 단 1%의 서운함이나 인간적인 섭섭함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42절).  왜냐하면 그녀 역시 영혼들이 인간의 유한한 소리(B)를 넘어, 진짜 지성소 성전이신 예수님의 생생하고 살아있는 말씀(B')을 친히 듣고 영생을 소유하는 독립적인 반석의 믿음으로 우뚝 서게 만드는 것이 사명자의 최고의 품삯이자 면류관임을 온전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2:19, 21, 3:34, 36, 4:36, 42).

 

3.   셋째 원리: 참된 성도의 삶은 인간이 그어놓은 모든 장벽을 깨부수고 복음의 지경을 넓히는 ‘선교적 선구자’의 발걸음이어야 합니다(요일 5:4).

 

상종하지 않는 장벽의 완전한 붕괴: 유대교 바리새인 체제와 세상 가치관은 언제나 자신들만의 혈통과 기득권, 노회와 교단이라는 높은 울타리 ‘안에’ 갇혀서 타인을 정죄하고 차단하는 장벽을 쌓아 올렸습니다(요 1:24, 25, 4:1, 9).

 

모든 성도의 실제 삶에의 적용: 그러나 위로부터 성령 세례를 받아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태어난 진짜 예배자들은(1:13, 33, 3:5, 4:23), 세상이 그어놓은 편견의 경계를 과감히 허물고 전진합니다.  성도님들이 가정과 일터와 이 시대 광야 같은 세상 속에서 감당해야 할 하루하루의 일상은, 내 익숙한 안락함과 평판(물동이)을 빌립보서 3장 8절 말씀대로 배설물로 기쁘게 내던져버리고(4:28, 빌 3:8), 세상에서 가장 목마르고 상처 입은 사마리아 여인 같은 영혼들에게로 낮아져 찾아가 “와서 보라” 완료형의 승리를 거침없이 뿜어내는 선구자의 삶이 되어야 마땅합니다(요 4:29).

 

우리가 내 이름표를 지워내고 오직 스스로 계신 하나님 예수의 주권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전진할 때(26절), 주님은 성도님들의 그 순전한 소리를 보증서로 삼으사, 음부의 권세를 완벽하게 깨뜨리시고 온 교회를 완료형의 안식과 천국 잔치로 날마다 충만하게 채워주실 줄 확실히 믿고 확신합니다(인터넷).

 

(3) 마지막 셋째로, 저는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ὡς οὖν ἦλθον πρὸς αὐτὸν οἱ Σαμαρῖται, ἠρώτων αὐτὸν μεῖναι παρ’ αὐτοῖς· καὶ ἔμεινεν ἐκεῖ δύο ἡμέρας (호스 운 엘돈 프로스 아우톤 호이 사마리타이, 에로톤 아우톤 메이나이 파르 아우토이스, 카이 에메이넨 에케이 뒤오 헤메라스)](요4:40)란 말씀의 의미를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 싶습니다.

 

(a) 사도 요한이 이 여정의 한복판에 기록한 ‘머물다’[μένω (메노)]라는 동사는 요한복음 전체에서 하나님과 성도가 누리는 가장 신비롭고 친밀한 영적 연합을 뜻하는 단어입니다(15:4).  이 사마리아 땅에서 이루어진 이틀간의 머무름이 오늘날 승리장로교회 모든 성도님과 주님의 사명자들이 일상의 삶 속에서 누려야 할 3가지 구체적인 성경적 원리와 실제적 삶의 적용을 인공지능이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첫째 원리: 인간이 그어놓은 ‘상종하지 않는 장벽’을 차단할 때, 비로소 주님과의 거룩한 ‘머무름’이 시작됩니다(4:40)

 

원어적 신비 ➔ 메이나이[μεῖναι (“유하시기를”)] ➔ 에메이넨 [ἔμεινεν (“유하시매”)]: 사마리아인들이 주님께 청한 ‘유하시기를’의 원어 ‘메이나이(μεῖναι)’와 주님이 거기서 ‘유하시매’의 원어 ‘에메이넨(ἔμεινεν)’은 모두 요한복음의 핵심 단어인 ‘메노(μένω, 거하다, 머물다, 상시 내재하다)’에서 유래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부정하게 여겨 그들이 쓰던 물건조차 섞어 쓰지 않는 높은 차단의 장벽을 치고 상종하지 않았습니다(9절).  만약 주님이 유대교 바리새인 체제의 교세 경쟁 소문이나 사람들의 평판에 내 마음을 의탁하고 계셨다면, 결코 이 이방 사마리아 땅에 발을 들이거나 함께 머물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모든 성도의 실제 삶에의 적용: 온 성도가 일상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진짜 임마누엘의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세상 속에 그어놓은 인간적인 편견과 고정관념의 울타리를 십자가 앞에 기쁘게 완전히 완전히 뒤엎어버려야 합니다.  내 지혜와 기득권을 자랑하려던 가짜 성전 건물(Something)의 자아를 완전히 허물어 비워버릴 때, 주님은 장소 중심의 건물을 넘어 우리 영혼의 마음 중심을 진짜 참된 지성소 성전으로 삼아주시고, 내면 속에 영원토록 마르지 않는 성령 세례의 생수와 친밀한 머무름의 사귐을 영원히 시작해 주십니다.

 

2.   둘째 원리: 주님과 함께 유하는 ‘이틀의 시간’은, 내 귀로 복음의 음성을 ‘친히 듣고 확신하는’ 믿음의 정화 시간입니다(4:40-42).

 

간접적인 소리에서 직접적인 말씀으로: 교차대칭구조에서 보듯이, 동네 사람들은 처음에는 여인의 간접적인 증언(B)만 듣고 예수를 향해 걸어 나왔습니다(39절).  그러나 주님이 그들과 함께 이틀을 유하시며(40절),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하나님의 생생하고 살아있는 말씀을 친히 가득 채워 공급해 주셨을 때(3:34, 4:41), 그들의 믿음은 완벽하게 도약하여 성숙해졌습니다.

 

모든 성도의 실제 삶에의 적용: 성도의 진짜 신앙은 타인의 신학적 연륜이나 목사님의 지혜라는 징검다리 소리에만 의존하는 유한한 단계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나 스스로 날마다 주님과 단둘이 마주 앉은 ‘골방의 틈새’ 안으로 들어가, 내 모든 부끄러운 실상(남편 다섯의 수치)을 참빛 앞에 투명하게 노출시키는 1:1 단독자의 시간을 통과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내 귀로 친히 듣고 심장에 완료형의 확신으로 새겨 넣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 환경의 장벽이나 사람들의 반응에 흔들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내 인생과 온 세상의 구주이십니다!”라고 흔들리지 않는 독립적인 반석의 믿음으로 우뚝 서게 됨을 가르쳐 줍니다.

 

3.   셋째 원리: 내 이름은 쇠하여 지워질지라도, 오직 ‘주님의 말씀만 흥왕해지는 것’이 사명자의 영원한 배부름입니다(요 3:29-30).

 

세례 요한식 자기 부인의 성취: 사마리아 여인은 동네 사람들이 주님과 이틀을 함께 머문 후,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 때문이 아니다”라고 자기를 철저히 무대 뒤로 지워버릴 때 단 1%의 서운함도 품지 않고 기쁘게 무대 뒤로 사라졌습니다(4:42).

 

모든 성도의 실제 삶에의 적용: 세례 요한이 고백했듯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셨던 그 하나님의 거룩한 주권적 필연성을 기쁨으로 수용하는 삶이 모든 성도와 사명자의 진짜 실력입니다(3:30).

내가 가정과 일터와 주님의 몸 된 교회 속에서 묵묵히 말씀의 물을 길어 올려 성도들의 굶주린 돌항아리 아귀까지 채워 대접하는 사명을 감당할 때, 내 수고나 이름표의 지분을 증명하려 들지 마십시오.  내 생각의 물동이를 기쁘게 배설물로 내던져버리고, 오직 신랑 예수님의 목소리 자체가 성도들의 심령 속에 해처럼 찬란하게 흥왕하여 떠오르는 것 자체를 최고의 품삯이자 완료형의 기쁨으로 삼으셔야 합니다.  나를 지우고 주님의 온전하신 성취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전진할 때, 주님은 음부의 권세를 완벽하게 깨뜨리시고 온 교회를 흠 없고 영광스러운 신부로 날마다 눈부시게 단장시켜 가실 줄 확실히 믿고 확신합니다(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