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탐욕비우기

 

 

 

앞 장에서 우리는 교만비우기를 통하여 하나님보다 자신을 높이고 자신의 뜻을 앞세우려는 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제5장에서는 교만과 함께 우리의 영혼을 깊이 사로잡아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하고 세상의 것을 끊임없이 움켜쥐게 만드는탐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서서 우리 안에 자리 잡은 탐욕의 정체를 직면하고, 그것을 어떻게 비워가야 하는지를 함께 깨달아야 합니다.

 

과거 한 대형 종합병원의 암센터 소장이었던 이희대 박사는 암세포의 생리적 성질을 영적인 원리와 대비하여 설명한 바 있습니다.  의학적 원리에 따르면 본래 우리 몸의 정상 세포는 일정한 질서에 따라 성장하고 죽는 과정을 규칙적으로 반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포의 유전자에 비정상적인 변이가 생겨 결코 죽지 않고 스스로를 파괴하지도 않은 채 끝없이 자라나는 기형적인 세포가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암세포입니다.  암세포가 진정으로 무서운 이유는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확장하고 성장시키기 위하여 다른 정상 세포들이 누려야 할 소중한 영양분까지 혼자 차지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 암세포는 신체 내부를 사방으로 퍼져 다니며 다른 세포에게 공급되어야 할 영양분을 거칠게 가로채어 독식하면서 성장합니다.  이러한 암세포의 모습을 영적으로 비유해 보면, 끊임없이 더 가지려 하면서 다른 것까지 파괴하는 탐욕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러한 암세포의 생리적 특성과 영적 파멸의 관계를 향하여 성경은 사도 야고보를 통하여 매우 선명한 영적 원리를 선포합니다.  야고보서 1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우리가 정직하게 깨달아야 할 분명한 진리는, 성경이 경고하는 이 탐욕이라는 괴물이 세상의 어떤 소유와 자본으로도 결코 만족될 수 없는 중독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탐욕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만족하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위로부터 주어지는 만나의 은혜에 감사하지 못하고 끝없는 탐심에 사로잡혔던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비참한 실상을 민수기의 기록을 통해 직시해야 합니다.  민수기 11 4절과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너희 코에서 넘쳐서 싫어하기까지 한 달 동안 먹게 하시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중에 계시는 여호와를 멸시하고 그 앞에서 울며 이르기를 우리가 어찌하여 애굽에서 나왔던가 함이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리 가운데 섞여 살아가던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그들처럼 탐욕을 품게 되었습니다.  탐심은 이처럼 세상의 세속적인 풍조를 통하여 성도들의 심령 깊은 곳까지 무섭게 전염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께서 날마다 내려 주시는 영광스러운 하늘의 만나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급기야 어린아이처럼 소리 높여 울면서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며 영적 지도자인 모세에게 고기를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처럼 중심에 탐욕이 가득 차오르자 그들의 판단력은 심각하게 흐려졌습니다.  급기야 과거 비참하게 종살이하며 학대를 받았던 죄악의 땅, 곧 애굽을 그리워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애굽에 있을 때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을 풍족하게 먹었던 때를 오히려 좋았던 시절로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멸망의 자리였던 애굽에 있을 때가 지금의 광야보다 훨씬 좋았다고 말했습니다(5, 18).

 

성경은 이처럼 구원의 은총을 가볍게 여기고 세상의 풍요와 정욕을 그리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그들 가운데 살아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멸시한 죄악으로 엄중하게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대로 메추라기를 보내셔서 그들이 질릴 정도로 고기를 먹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탐욕은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과 파멸의 자리로 이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고기가 아직 그들의 이 사이에서 씹히기도 전에 진노의 재앙으로 그들을 치셨습니다.  그 결과 하늘의 만나를 멸시하고 고기에 대한 눈먼 탐욕을 버리지 못했던 사람들이 그곳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처참한 심판의 흔적이 남은 곳의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 탐욕의 무덤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11:34).  탐욕은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결국 그 사람을 삼키고 파멸시키는 우상이 됩니다.

 

탐욕은 다른 사람의 권리까지 빼앗게 합니다

 

더욱 두려운 것은 탐욕이 개인의 마음에만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의 권리와 삶까지 해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탐욕에 눈이 먼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하게 순종하는 의인을 만나더라도, 자신의 뜻대로 소유를 얻지 못하면 옹졸하게 분노하며 악한 일을 계획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탐욕의 실상을 성경에 기록된 아합 왕의 모습에서 분명하게 직면해야 합니다.  

 

열왕기상 21 3~4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되 내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하니 아합이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자기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내 조상의 유산을 왕께 줄 수 없다 하므로 근심하고 답답하여 왕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음식을 먹지 아니하니.”  이스라엘의 아합 왕은 왕궁 곁에 있던 나봇의 포도원을 자신의 채소밭으로 삼고자 탐욕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나봇은 조상의 기업을 함부로 팔지 말라는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기 위하여 왕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참으로 비참한 사실은 하나님의 명령에 신실하게 순종한 나봇의 말을 들은 아합 왕의 태도입니다.  자신의 탐심이 거절당하자 그는 기분이 상하여 몹시 낙심한 채 왕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음식도 먹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주님의 법도를 지키는 그리스도인으로 인하여 자신이 원하는 세속적인 이익을 얻지 못하게 될 때 심하게 불쾌해하며 원망의 독을 쏟아내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원하는 소득이나 이익을 얻지 못했다는 이유로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난다면, 우리는 그 상태 자체가 이미 탐욕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위태로운 인간의 실상을 향하여 엄중하게 경고하십니다.  누가복음 12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우리는 어떤 형태의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날마다 자신의 마음을 살피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만일 내면의 탐심을 비워내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한다면, 그 탐욕은 결국 가정을 무너뜨리는 비극의 도화선이 되고 맙니다.

 

탐욕은 가정과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아합 왕의 곁에는 아합의 탐욕을 멈추게 해야 할 이세벨은 오히려 그의 욕망에 동조하여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아 아합의 손에 넘겨주겠다고 장담했습니다(왕상 21:7).  그녀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전혀 경외하지 않는 어리석은 아내였습니다.  잠언 14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지혜로운 여인은 자기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  이 말씀의 원리처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물질적 욕심을 채우기 위해 악을 도모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결국 자기 손으로 소중한 가정을 허물고 파괴하는 길을 걷게 됩니다.  이세벨의 탐욕은 마침내 신실한 의인 나봇에게 거짓 누명을 씌워서라도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잔혹한 죄악으로 치달았습니다.  열왕기상 21 13~14절 말씀을 보십시오: “때에 불량자 두 사람이 들어와 그의 앞에 앉고 백성 앞에서 나봇에게 대하여 증언하여 이르기를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매 무리가 그를 성읍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고 이세벨에게 통보하기를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나이다 하니.”  그들은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던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는 거짓 증언을 조작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나봇을 성읍 밖으로 끌고 나가 돌로 쳐 죽였습니다(15).  탐욕은 이처럼 단순히더 많이 갖고 싶다는 욕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통제되지 않은 탐욕은 결국 다른 사람의 권리와 명예를 침해하고, 더 나아가 한 사람의 생명까지 빼앗는 죄악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과 일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소득을 더 늘리고 기득권을 차지하려는 탐욕 때문에 원칙을 지키는 신실한 동료를 모함하거나 축출하고, 다른 사람에게 억울한 상처를 입히고 있다면 우리는 자신의 내면이 이미 아합과 이세벨의 탐욕에 물들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마음으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탐욕은 만족을 빼앗고 불평을 낳습니다

 

나아가 우리는 이러한 탐욕이 인간의 영혼과 정신을 얼마나 어리석고 비참하게 만드는지도 직시해야 합니다.  전도서 7 7절은 “탐욕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하게 하느니라”고 경고합니다. 이 말씀처럼 탐욕은 지혜로운 사람의 판단까지 흐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쉽게 조급해지고 분노할 수 있습니다.  

 

전도서 7 8~9절 말씀을 보십시오.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참된 비우기를 잊어버리고 탐심에 눈이 먼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의 결과를 인내하며 기다리기보다 자신의 욕심을 당장 채우려고 조급해합니다.  마음이 교만해진 까닭에 끝까지 신실하게 인내하지 못하고, 일터와 가정의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원망하며 성급하게 분노를 쏟아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급한 분노가 지혜로운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우매한 자의 품에 머무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경고합니다.  뿐만 아니라 탐욕에 오염되어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매일의 삶 속에서 영적인 불평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전도서 7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찌함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은 지혜가 아니니라.”  탐심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언제나왜 지금의 내 형편이 과거보다 이렇게 못한가?”라고 탄식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의 일터와 가정에 베풀어 주신 은혜에는 감사하지 못한 채, 자신이 과거에 누렸던 전성기만을 그리워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오늘의 은혜에 감사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소유의 크기를 비교하며 과거의 영광만을 좇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참된 지혜가 아닙니다.

 

종교의 탈을 쓴 탐욕

 

나아가 기독교 신앙에서 드러나는 탐욕의 가장 추악하고 교묘한 모습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처럼 거룩한 종교의 탈을 쓰고 있으면서도, 그 내면에서는 오직 재물과 물질을 숭배하는 영적 외식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위장된 탐욕의 실상을 누가복음 16 14~15절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통해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주님의 가르침을 들은 바리새인들을 본질적으로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로 묘사하며 그들의 부패한 중심을 폭로합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오히려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그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겉으로는 거룩하게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그 마음속에서는 돈과 재물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돈을 좋아하면서도 사람들 앞에서는 자신을 의롭게 보이려 했습니다. 결국 재물에 대한 사랑과 종교적인 자기 의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물질적 성공과 풍요를 하나님의 축복과 지나치게 동일시하면서 탐욕을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할 위험이 있습니다.  교회의 외형적인 성장이나 재정적인 풍요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자동으로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돈과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이 그 이유만으로 공동체 안에서 특별한 영적 권위를 얻어서도 안 됩니다.  교회는 사람의 재산이나 지위보다 믿음과 인격과 섬김의 열매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교회가 신실함보다 재물과 사회적 영향력을 더 높이 평가한다면, 공동체 역시 탐욕의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하나님의 은혜”, “기도 응답”, “교회의 성장과 같은 신앙적인 표현 뒤에 돈과 권력에 대한 욕망이 숨어 있지는 않은지 말씀 앞에서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한 경고를 줍니다.  우리 역시 바리새인들이 빠졌던 탐욕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법적인 절차에 문제가 없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도 정당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은혜’, ‘기적적인 기도 응답’, ‘교회의 놀라운 성장’과 같은 신앙적인 표현 뒤에 돈과 권력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외형적인 성공이나 합법적인 절차만을 보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그 안에 숨겨진 사람의 마음과 동기를 살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의 거울 앞에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탐욕을 발견하고 비워야 합니다.

 

성경은 재물에 눈이 멀어 사명을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영적 지도자들을 더욱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이사야 56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여기서 주님께서 책망하시는 탐욕의 중요한 특징은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 떼를 돌보며 섬겨야 할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가 자신의 이익과 재물을 늘리는 일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의 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목회와 사역마저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게 될 때, 한 지도자의 탐욕은 자신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깊은 상처를 입힐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경건하게 보이려고 겉모습을 깨끗하게 꾸몄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내면을 보셨습니다.  누가복음 11 39절에서 주님은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겉으로는 정결해 보였지만 그 중심에는 탐욕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르파게’에 담긴 탐욕의 의미

 

여기서 누가복음 11 39절에서탐욕’으로 번역된 헬라어는하르파게’(ρπαγή, harpagē)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마음속으로 무엇을 더 갖고 싶어 하는 욕망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거나 착취하여 자신의 것으로 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탐욕은 단순히 ‘조금 더 갖고 싶다’는 마음의 욕심에 그치지 않습니다.  탐욕이 자라나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몫을 침해하고, 다른 사람의 권리와 소유까지 빼앗는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경건한 사람처럼 보이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희생시킨다면,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경고하신 종교적인 탐욕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에게 탐욕은 더욱 위험합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돈과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단에서는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18:1)라고 선포하면서도, 삶에서는 돈을 자신의 힘과 안전과 미래를 보장해 주는 것으로 붙들고 있다면 자신의 마음을 말씀 앞에서 정직하게 살펴야 합니다.

 

참된 회개는 입술의 고백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3:8)고 외쳤듯이, 탐욕에 대한 회개도 삶의 변화로 나타나야 합니다.  돈을 사랑하면서도 신앙적인 말로 그것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이익을 거절하고, 정직하게 재물을 사용하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이웃과 나누는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누가복음 16 14절은 바리새인들을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돈을 좋아하는’이라는 말은 헬라어필라르귀로이’(φιλάργυροι, philargyroi)에서 나온 표현으로, 문자 그대로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돈이 주는 안전과 힘을 더 의지하고 있는가?

 

탐욕을 비우기 위해서는 우리의 시선이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시편 119 11절과 36~37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 내 마음이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이 말씀은 탐욕을 비우는 중요한 길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지 않으면 시선은 쉽게 세상의 재물과 소유를 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을 마음에 두고 그 말씀 앞에서 자신을 살피면, 성령께서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탐욕을 비우는 일은 단순히 돈을 적게 가지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시선을 다시 하나님께 돌리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도 디모데전서 6 10절에서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문제는 돈 자체가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돈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재물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 맡기신 도구가 아니라 우리 마음을 지배하는 주인이 됩니다.  더 많은 돈과 소유를 얻기 위해 신앙과 양심을 희생하게 되고, 결국 믿음에서 벗어나 많은 근심으로 자신을 찌르게 됩니다.  탐욕은 우리에게 “조금만 더 가지면 만족할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탐욕에는 끝이 없습니다. 더 가지면 더 갖고 싶어지고, 더 높아지면 더 높아지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탐욕을 비우지 않으면 아무리 많이 소유해도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풍요 속에서도 탐욕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려움과 결핍을 만날 때 하나님을 더욱 간절히 찾기도 합니다.  그러나 풍요로울 때에도 우리의 믿음은 시험을 받습니다.  소득이 늘어나고 생활이 넉넉해지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잊고 자신의 능력과 재물을 의지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시편 73 7절은 “그들의 눈은 지방으로 살찌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라고 말씀합니다.  풍요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복을 주시는 것 역시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풍요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더 많은 것을 움켜쥐려는 탐욕을 일으킨다면, 그 풍요는 오히려 우리의 영혼에 위험이 될 수 있습니다.  돈과 재물은 그 자체가 우리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고, 가정을 돌보며, 이웃을 사랑하고,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맡기신 도구입니다.  그러나 돈이 도구의 자리에서 주인의 자리로 올라가면 문제가 시작됩니다. 우리가 돈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탐욕에 사로잡히면 물질을 많이 가질수록 만족하기보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됩니다. 더 많은 소유가 더 큰 욕망을 낳고, 그 욕망은 다시 더 많은 소유를 추구하게 합니다. 결국 사람은 탐욕의 굴레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재물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중요하게 가르치셨습니다.  누가복음 16 9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영접하리라.  재물은 우리가 섬겨야 할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도구입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사용하고 있느냐입니다.  재물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지 않도록 하고, 하나님 나라와 이웃을 섬기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탐욕을 비우고 자족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재물의 유혹이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우리는 세상이 끊임없이 부추기는 탐욕을 마음에서 비워야 합니다.  더 많이 소유해야 행복하고, 남보다 더 많이 가져야 안전하며, 더 많이 쌓아 두어야 미래가 보장된다는 세상의 소리에 우리의 마음을 내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자기를 비워 죽기까지 복종하는 본을 보여 주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내 안에 있는 더 가지려는 욕망과 내가 주인이 되려는 마음을 날마다 비워야 합니다.  내 이익과 소유와 평판을 지키는 것이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지 않도록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비워진 마음은 그리스도로 채워져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자본이 주는 넉넉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만족하는 자족의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값없이 주신 영생의 선물과( 6:23),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8:38~39).

 

그러므로 일터와 가정의 형편이 우리의 기대와 다르더라도 이미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반대로 물질적으로 풍요로울 때에도 그 풍요를 자신의 것으로 움켜쥐지 말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으로 받아야 합니다.  탐욕을 비운다는 것은 돈을 버리거나 재물을 멀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내 마음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탐욕을 비우는 사람은 재물을 움켜쥐기보다 감사하며 사용하고, 필요한 사람과 나누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위해 기꺼이 흘려보냅니다.  더 많이 가지는 데서 만족을 찾지 않고,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은혜로 만족하는 법을 배웁니다.  탐욕은 끊임없이 “더 가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충분하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정과 일터와 교회에서 날마다 실천해야 할 ‘탐욕 비우기’의 길입니다.

 

 

 

 

 

 

 

 

 

 

 

 

 

 

탐욕비우기의 원리 및 실천 지침

 

 

 

지금까지 우리는 말씀을 통해 탐욕이 얼마나 쉽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하나님보다 재물을 의지하게 만드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 탐욕을 어떻게 비워 갈 수 있을까요?  탐욕은 한 번의 결단으로 사라지는 죄가 아닙니다.  날마다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재물을 바르게 사용하며, 더 가지려는 욕망이 마음의 주인이 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가정과 교회와 일터에서 실천할 수 있는 탐욕 비우기의 원리와 지침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는 자족을 배우십시오.

 

탐욕은 끊임없이 “조금만 더 가지면 만족할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가진 것이 많아진다고 반드시 만족도 커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은 것을 원하는 탐욕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유의 많고 적음이 나의 만족을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만족을 배우십시오.  “내게 있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보다 “하나님께서 이미 내게 얼마나 많은 은혜를 주셨는가”를 먼저 생각하십시오.  자족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에 감사하면서, 더 가지려는 욕망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믿음의 훈련입니다.

 

2.   움켜쥐기보다 나누고 베푸는 삶을 실천하십시오.

 

탐욕은 손을 움켜쥐게 하지만 사랑은 손을 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재물을 자신의 만족과 즐거움만을 위해 사용하지 말고, 가족을 돌보고 이웃을 사랑하며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도 기꺼이 사용하십시오.  십일조와 구제와 나눔도 이러한 훈련이 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돈을 내는 종교적인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나는 그것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사실을 삶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재물을 나누는 것은 돈 자체를 미워해서가 아닙니다.  돈이 내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서입니다.  움켜쥔 손을 펼 때 재물은 나를 지배하는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위해 사용하는 도구가 됩니다.

 

3.   말씀 앞에서 자신의 욕망을 날마다 살피십시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면 시선은 쉽게 세상의 재물과 성공을 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말씀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나는 왜 이것을 더 가지고 싶은가?  “이것은 정말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남보다 더 가지고 싶은 욕망인가?  “이 선택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지혜롭게 사용하는 것인가, 아니면 나의 욕심을 채우려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을 말씀 앞에서 정직하게 던져 보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필요와 욕망을 구별하는 훈련을 하십시오.  사고 싶은 것이 생겼다고 곧바로 사지 않고 기다려 보는 것,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는 것, 생활의 기대치를 조금 낮추는 것,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감사하며 사용하는 것도 탐욕을 비우는 실제적인 훈련입니다.  말씀으로 마음을 채울수록 세상의 욕망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는 조금씩 비워지게 됩니다.

 

4.   돈과 관련된 모든 일에서 정직을 선택하십시오.

 

참된 회개는 말로만 끝나지 않고 삶의 변화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나 “기도 응답”이라는 신앙적인 말로 자신의 돈 사랑이나 욕망을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일터에서는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정직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거나 부당한 방법으로 이익을 얻지 마십시오. 수입과 지출을 정직하게 관리하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방법으로 일하고 돈을 벌어야 합니다.  교회와 사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자신의 이익이나 명예를 얻는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재정과 자원을 자신의 것처럼 여기지 말고 정직하고 투명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탐욕을 비우는 회개는 불의한 이익을 거절하고, 정직하게 일하며,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5.   이미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십시오.

 

탐욕과 감사는 같은 마음을 동시에 지배하기 어렵습니다.  탐욕은 없는 것을 바라보게 하지만 감사는 이미 받은 은혜를 바라보게 합니다.  내 계획대로 재정이 채워지지 않고 생활이 어려울 때에도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반대로 형편이 좋아지고 소득이 늘어날 때에도 그것을 자신의 능력만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십시오.  가정에서도 다른 사람의 형편과 비교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주신 것을 감사하십시오.  일터에서도 다른 사람의 직책과 소득을 바라보며 불평하기보다 지금 맡겨 주신 일과 기회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감사가 깊어질수록 더 가지려는 마음은 비워지고, 이미 받은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실천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탐욕을 비울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내 힘으로 탐욕을 이겨내겠다”는 생각마저 또 다른 자기 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탐욕을 비우는 일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 안의 탐욕을 보여 주실 때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움켜쥔 손을 펴야 하고, 불의한 이익을 거절해야 하며, 가진 것을 나누고, 감사와 자족을 실제 삶에서 훈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수동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순종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탐욕 비우기는 내 힘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날마다 순종하는 제자도의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내 안의 탐욕을 보여 주시면 회개하고, 세상의 재물에 붙들려 있던 시선을 다시 그리스도께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 제 안에 있는 탐욕을 보여 주시고 회개하게 하십시오.  더 가지려는 욕망이 제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시고, 제가 주인이 되려는 마음을 비우게 하십시오.  이미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자족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재물을 정직하게 사용하며 기꺼이 나누게 하십시오.  성령께서 저를 도우셔서 돈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재물보다 주님을 의지하게 하십시오.  이처럼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하나님께 맡기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이 탐욕을 비우는 실제적인 길입니다.  탐욕을 비운다는 것은 단순히 돈을 멀리하거나 적게 가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돈이 차지하고 있던 마음의 자리를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재물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비우기의 목적은 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더 가지려는 마음을 비우고 그 자리를 그리스도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하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감사함으로 사용하고,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며,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위해 기꺼이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탐욕은 끊임없이 “더 가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충분하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정과 교회와 일터에서 날마다 실천해야 할 “탐욕 비우기”의 길입니다.